이동연-농구, NBA 그리고 문화 효과 in 이동연 외. 1998. 스포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삼인.
(...)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1970년대는 축구가 지배적인 운동 경기였다. 이 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 온종일 동네 골목과 학교 운동장에서 공 찬 기억밖에 없을 것이다. 먼지 먹으면서 서로 한데 엉키고 설켜서 무식하게 치달리고 공을 차 댔던 시절, 그때는 어떤 집단적이고 공동체적인 어우러짐과, 투박하고 무질서하고 원초적인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동네에 공터도 많았고, 지금같이 골목마다 즐비한 자가용도 거의 없었던 때라, 밥 먹고 달리 할 게 없었던 아이들에게 동네 축구는 소중한 놀이 중의 하나였다. 소위 축구라는 운동은 공 하나면 20여 명이 함께 경기를 할 수 있고,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제하는 뇌 기능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발을 이용하는 가장 집단적이고 원시적인 운동 경기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축구가 우리네 동네 스포츠의 절대 몫을 담당했던 시대는 동네마다의 공동체적인 연대가 유지될 수 있었던 시대이고, 그 특유의 투박한 집단성에서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산업 사회의 근대성의 아우라가 체현되던 시대이다.
1980년대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야구는 축구를 제치고 대중 사이에서 지배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야구가 한국 최초의 프로 스포츠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1980년대 초반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포함해서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야구라는 운동 경기가 갖는 '볼거리의 세련됨' 때문이다. 야구는 축구처럼 어떤 조직적인 틀이 존재하지만, 집단의 협업을 강조하는 축구보다는 개인들의 분업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 (p.216) (...) 말하자면 야구는 축구에 비해 개인주의적이고 분업적이고 개성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가난과 역경을 헤친 무명 야구 선수들의 성공이 인간 승리로 곧잘 스포츠 신문 커버스토리에 클로즈업되곤 하는 메커니즘이 생겨나는 것은 야구 자체가 갖는 독특한 개인주의적 특성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서 농구의 득세는 축구와 야구와는 다른 역사를 말해준다. 거칠게 말해 축구에서 야구로의 발전이 경제적인 성장 드라이브 측면에서 산업 자본주의에서 독점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읽게 해 준다면, 야구에서 농구로의 발전은 독점 자본주의에서 후기 자본주의(다국적, 소비, 문화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읽게 해 준다. 실제로 한국 프로 야구의 출범은 국내 독점 재벌들이 없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최근 농구의 상한가는 정보와 매체가 주도하는 다문화 시대의 문화 자본이란 호재가 아니었으면 그 유지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으로 보면 축구에서 야구로, 야구에서 농구로 가는 과정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과정을 아주 명시적으로 보여 준다.
혹자는 농구의 인기를 일부 청소년층에 국한시키면서, 단지 청소년들과 농구 사이의 문제만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농구가 청소년들에게 인기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연예인 뺨치는 농구 선수들의 수려한 외모에 있다고 말하는 식의 설명 말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설명 자체도 축구와 야구와 다른 육체적.경제적 조건이다. 축구와 야구 선수들이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가난한 직업 환경에서 자라 온 경우가 많은 반면, 농구 선수들은 대개가 중산층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당연(p.217)히 그들의 건장한 신체 조건과 반듯한 외모는 그들의 성장기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되기 쉽다. 가난의 역경을 이긴 국내 축구 선수나 야구 선수들의 입지전적 신화는 자주 들어 봤어도, 농구 선수들에게서 이런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p.218)
2008년 5월 1일 목요일
2008년 4월 29일 화요일
세계체육사-노희덕
2. 경기 스포츠의 보급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각 대학에 초빙된 외국인 교사들에 의해 수많(394)은 서구식 스포츠가 전해졌다. 예를 들어서 야구는 개척사가학교의 교사 베츠, 동경대학의 전신인 개성(開成) 학교의 교사 윌슨 등에 의해 1873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 후에도 개성학교의 마젯 등도 야구를 열심히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77년 미국에서 귀국한 히라오카도 보스턴에서 철도기술을 배우는 한편 야구도 배워, 귀국 후 철도국에 야구팀을 결성하여 당시 야구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식으로 메이지 시대에는 많은 스포츠가 전해져 어떤 것은 일본 국내에서 정착되지 않았으나 야구, 축구, 육상경기, 럭비, 배구, 수구, 탁구, 정구, 골프, 하키, 조정, 수구, 스키 등은 일본에서도 완전히 정착하여 오늘날에도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 전해진 수많은 스포츠는 초기에는 학교를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예를 들어서 고등사범학교에서는 정구, 풋볼, 야구 등 8가지 운동부를 설치하고 학생들은 적어도 하나의 운동부에 소속되어 일정한 시간 운동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학교에서 클럽조직을 만들어 학교대항 경기 등도 많이 행해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기 스포츠는 이와 같이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한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야구나 축구와 같은 경기는 넓은 공간이 필요(395)한데, 이때 마침 중학교에서 병식체조가 학교에 도입되었다. 병식체조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에서 쉽게 경기 스포츠를 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학생을 중심으로 한 경기조직이 창설되어 학교대항 경기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와세다 대학 구장에서는 1933년에 야구와 럭비에서 처음으로 야간경기가 실시되었다. 특히 야구는 흥행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1934년에는 동경야구클럽이 프로팀으로 설립되었다. 이 팀은 미국의 프로야구팀의 도일을 계기로 창설되었는데, 1935년에는 미국에 원정도 하였다. 1936년에는 직업야구연맹의 결성과 프로야구 전문구장의 완성으로 프로야구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3. 올림픽 참가
1909년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장이었던 가노지고로오(嘉納治五郞)는 당시 프랑스 대사에 의해 IOC 위원으로 추천되어 일본인으로 처음으로 위원이 되었다. 그 후 1912년 스톡홀름 대회참가를 목표로 1911년에 대일보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단거리와 마라톤에 한 명씩 선수를 보냈다. 입상은 할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참가하였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 후 1920년 안토와프 대회에는 19명, 제8회 파리 대회에는 26명,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63명,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에는 122명, 제11회 베를린 대회에는 294명이 참가하여 우승자도 9회에 2명, 10회 7명, 11회에는 마라톤의 손기정을 포함하여 6명이 나왔다.(396)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각 대학에 초빙된 외국인 교사들에 의해 수많(394)은 서구식 스포츠가 전해졌다. 예를 들어서 야구는 개척사가학교의 교사 베츠, 동경대학의 전신인 개성(開成) 학교의 교사 윌슨 등에 의해 1873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 후에도 개성학교의 마젯 등도 야구를 열심히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1877년 미국에서 귀국한 히라오카도 보스턴에서 철도기술을 배우는 한편 야구도 배워, 귀국 후 철도국에 야구팀을 결성하여 당시 야구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런 식으로 메이지 시대에는 많은 스포츠가 전해져 어떤 것은 일본 국내에서 정착되지 않았으나 야구, 축구, 육상경기, 럭비, 배구, 수구, 탁구, 정구, 골프, 하키, 조정, 수구, 스키 등은 일본에서도 완전히 정착하여 오늘날에도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일본으로 전해진 수많은 스포츠는 초기에는 학교를 중심으로 보급되었다. 예를 들어서 고등사범학교에서는 정구, 풋볼, 야구 등 8가지 운동부를 설치하고 학생들은 적어도 하나의 운동부에 소속되어 일정한 시간 운동해야 하는 것으로 되었다. 이런 식으로 전국의 학교에서 클럽조직을 만들어 학교대항 경기 등도 많이 행해지게 되었다. 일본의 경기 스포츠는 이와 같이 학교를 중심으로 발전한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야구나 축구와 같은 경기는 넓은 공간이 필요(395)한데, 이때 마침 중학교에서 병식체조가 학교에 도입되었다. 병식체조는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에서 쉽게 경기 스포츠를 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학생을 중심으로 한 경기조직이 창설되어 학교대항 경기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와세다 대학 구장에서는 1933년에 야구와 럭비에서 처음으로 야간경기가 실시되었다. 특히 야구는 흥행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어 1934년에는 동경야구클럽이 프로팀으로 설립되었다. 이 팀은 미국의 프로야구팀의 도일을 계기로 창설되었는데, 1935년에는 미국에 원정도 하였다. 1936년에는 직업야구연맹의 결성과 프로야구 전문구장의 완성으로 프로야구가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3. 올림픽 참가
1909년 동경고등사범학교 교장이었던 가노지고로오(嘉納治五郞)는 당시 프랑스 대사에 의해 IOC 위원으로 추천되어 일본인으로 처음으로 위원이 되었다. 그 후 1912년 스톡홀름 대회참가를 목표로 1911년에 대일보체육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듬해 단거리와 마라톤에 한 명씩 선수를 보냈다. 입상은 할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참가하였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 후 1920년 안토와프 대회에는 19명, 제8회 파리 대회에는 26명, 제9회 암스테르담 대회에는 63명,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에는 122명, 제11회 베를린 대회에는 294명이 참가하여 우승자도 9회에 2명, 10회 7명, 11회에는 마라톤의 손기정을 포함하여 6명이 나왔다.(396)
2008년 1월 23일 수요일
로동신문 1981년 12월 3일자 논평
"최근 남조선의 군사 파쑈 분자들은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게 된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괴뢰 당국의 고위층과 관계 요원들, 그리고 어용 나팔수들을 내세워 매일같이 괴이한 소란을 피우고 있다. 이번 기회에 사회주의 나라들과 쁠럭 불가담 나라들에 접근하여 국교 및 공식 관계를 맺어 보려는 괴뢰들의 책동은 남조선을 그 무슨 <국가>로 인정받아 보자는 것이다."
박세직,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p.49
아무리 로동신문의 기사라도 꽤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싶었다. 어투는 그렇다치더라도 내용은 올림픽 개최의 목적 중 하나인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에 대한 북한의 민감한 반응을 반영하고 있다.
박세직,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p.49
아무리 로동신문의 기사라도 꽤나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싶었다. 어투는 그렇다치더라도 내용은 올림픽 개최의 목적 중 하나인 공산권과의 교류 확대에 대한 북한의 민감한 반응을 반영하고 있다.
2008년 1월 5일 토요일
88 올림픽 연구를 시작하며
도서관에서 국내 문헌을 찾다 보면 '박세직'이라는 이름의 저자를 쉽게, 많이 발견하게 된다. 86년부터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은 분이다. 무작정 그분의 저서 중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라는 책을 먼저 빌려보았다. 앞 부분을 잠시 읽어보니 책 제목에서 나타나듯 학술적인 책이 아님은 물론 감정적이다 못해 격정적이고 감격에 가득찬 저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질 지경이다. 서울올림픽은 그토록 기적의 대회였단 말인가. 저자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깊게 배어있어 독서에 방해가 되기도 하지만, 정말 저렇게 좋으셨나 싶어 실소를 머금기도 한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이 어떤 방식으로건 한국을 크게 바꾼 것은 사실이기에 이 대회를 운영하신 분의 고충을 잠자코 들어보아야 할 터이다. 이제 시작이다.
서 명 :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
개인저자 : 박세직, 1933-
발행사항 : 서울: 고려원, 1990.
서 명 :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
개인저자 : 박세직, 1933-
발행사항 : 서울: 고려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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